런던 근교에서 만나는 한 폭의 풍경화, 페인실(Painshill)
런던에서 조금 벗어나 자연 속을 천천히 걷고 싶다면 서리주 코범(Cobham)에 자리한 페인실(Painshill)을 추천한다. 일반적인 공원이라기보다 호수와 숲, 인공 동굴과 여러 건축물을 하나의 풍경 속에 배치한 18세기 영국식 풍경 정원이다. 걷는 위치에 따라 새로운 장면이 나타나도록 설계되어 있어 정원을 둘러보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유럽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살아 있는 풍경화’
페인실은 찰스 해밀턴(Charles Hamilton)이 1738년부터 1773년까지 약 35년에 걸쳐 조성한 18세기 풍경 정원이다. 그는 젊은 시절 유럽 여러 지역을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를 경험하며 고전 건축과 회화,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여행 중 보았던 인상적인 장면들을 자신의 정원 안에 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럽의 건축물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는 언덕과 호수, 나무, 오솔길과 건축물을 세심하게 배치하여 방문객이 한 폭의 풍경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페인실을 걸어보면 단순히 아름다운 식물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정원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무 사이로 호수가 나타나고, 조금 더 걸으면 고딕 양식의 사원이나 폐허처럼 보이는 수도원, 터키식 텐트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어떤 장소는 가까이에서 건축물을 감상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어떤 장소는 멀리 떨어진 언덕이나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볼 때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방문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과 풍경이 바뀌도록 계산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영국식 풍경 정원도 실제로는 호수를 만들고 지형을 다듬으며 나무를 계획적으로 심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페인실 역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한 공원이라기보다 자연의 장점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도록 세심하게 연출한 공간에 가깝다. 이러한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페인실은 영국의 Grade I 등록 공원 및 정원으로 지정되었다. 미술관에서 액자 속 그림을 감상하는 대신, 직접 그림 속을 걸어 다니며 여러 장면을 만난다고 생각하면 이곳의 매력을 이해하기 쉽다.

크리스털 그로토와 호수 주변에서 만나는 특별한 풍경
페인실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단연 크리스털 그로토(Crystal Grotto)이다. 겉에서 보면 바위로 만들어진 소박한 동굴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동굴 내부의 벽과 천장은 수정처럼 반짝이는 광물과 결정 장식으로 뒤덮여 있으며, 천장에 만들어놓은 작은 틈 사이로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햇빛이 결정과 물에 반사되면 동굴 전체가 은은하게 빛나면서 신비로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자연 동굴처럼 거칠게 표현된 바위와 화려하게 반짝이는 장식이 함께 어우러져 현실에서 잠시 떨어져 나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털 그로토 하나만을 보기 위해 빠르게 이동하기보다는 호수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이 좋다. 정원 곳곳에는 고딕 템플(Gothic Temple), 루인드 애비(Ruined Abbey), 터키시 텐트(Turkish Tent)와 같은 폴리(folly)가 배치되어 있다. 폴리는 실용적인 목적보다 풍경에 아름다움과 이야기를 더하기 위해 만든 장식용 건축물을 뜻한다. 일부 건축물은 오래된 유적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낭만적인 폐허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의 건축 양식을 한 정원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도 페인실만의 흥미로운 특징이다.
여유롭게 둘러본다면 전체 산책에는 약 2~3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숲과 넓은 잔디밭, 서펀타인 호수(Serpentine Lake)를 지나며 여러 전망을 감상할 수 있어 날씨가 좋은 날에는 피크닉을 겸해 반나절을 보내기에도 좋다. 다만 크리스털 그로토를 포함한 일부 시설은 날씨, 행사 또는 유지·보수 작업으로 운영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크리스털 그로토는 정기적인 관리를 위해 일반적으로 월요일에 문을 닫으므로, 이곳을 꼭 보고 싶다면 방문 전에 공식 홈페이지에서 당일 개방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안전하다.
폐허가 된 정원을 되살린 페인실의 복원 이야기
오늘날의 페인실은 18세기의 모습이 온전히 보존되어 지금까지 이어진 정원은 아니다. 찰스 해밀턴은 오랜 기간 빚을 내면서 정원을 조성했고, 결국 심각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1773년 페인실을 매각해야 했다. 이후 정원은 여러 소유주에게 넘어가며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지만 기본적인 풍경은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서 나무와 잡초가 산책로와 전망을 가리기 시작했고, 정원을 장식하던 여러 건축물도 무너지거나 사라졌다. 1973년에는 고딕 타워 내부가 화재로 소실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해밀턴이 의도했던 ‘살아 있는 풍경화’는 점차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해졌다.
1960년대부터 지역 역사 연구가와 정원 전문가들이 페인실의 중요성을 알리고 남아 있는 흔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엘름브리지 자치구는 1980년까지 원래 부지 약 250 에이커 가운데 158 에이커를 매입했다. 이듬해인 1981년에는 찰스 해밀턴의 원래 구상에 최대한 가깝게 정원을 복원하기 위해 페인실 파크 트러스트(Painshill Park Trust)가 설립되었다. 복원팀은 단순히 낡은 건물을 새것처럼 고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고고학적 조사와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과거 산책로의 위치, 식재 방식, 건축 재료와 전망의 방향까지 연구했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정리하고 사라진 길과 화단을 되살려 방문자가 이동할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만나도록 한 해밀턴의 설계를 다시 구현하고자 했다.
고딕 템플은 1985년 가장 먼저 복원된 건축물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후 고딕 타워와 루인드 애비, 터키시 텐트 등도 차례로 복원되었다. 2004년에는 부지에서 나온 목재를 이용해 허미티지(Hermitage)를 다시 지었고, 페인실의 대표 명소인 크리스털 그로토 역시 오랜 연구와 작업을 거쳐 복원되었다. 언덕 위의 템플 오브 바커스(Temple of Bacchus)는 1981년 트러스트가 설립되었을 당시 이미 무너진 상태였지만, 복원 작업을 통해 외관을 되찾았다. 이처럼 현재 우리가 보는 페인실의 아름다운 풍경 뒤에는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조사와 복원,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이 담겨있다. 페인실은 완성된 과거의 유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라진 풍경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되살려 나가는 현재진행형의 복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직접 다녀와서 느낀 점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드넓은 공간에서 전해지는 여유로움과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페인실에는 휠체어나 유모차도 비교적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포장된 짧은 코스와, 울퉁불퉁한 자연 그대로의 길을 따라 오래 걸을 수 있는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나는 페인실을 충분히 둘러보고 싶어 긴 코스를 선택해 걷기 시작했다.
산책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페인실 근처에 살았다면 연간 회원권을 끊고 정말 자주 방문했겠다’는 것이었다. 런던 시내의 공원도 한국의 일반적인 공원과 비교하면 규모가 상당히 크지만, 그만큼 방문하는 사람도 많다. 반면 페인실은 런던 시내의 공원보다도 훨씬 넓게 느껴졌지만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래서 새소리와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온전히 들으며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라고 느꼈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주변 풍경이 조금씩 달라진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숲과 호수, 크리스털 그로토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오래 걸어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나는 약 한 시간을 걸어서야 코스의 절반 정도를 돌 수 있었다. 그 지점에 도착하면 높은 건축물을 만날 수 있는데, 그곳에는 작은 카페도 있다고 한다. 다만 카페는 오후 3시에 문을 닫고, 나는 오후 3시 30분이 되어서야 도착해 이용하지 못했다.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라면 가능하면 오후 2시 이전에 도착하여 여유롭게 산책하다가, 카페가 문을 닫기 전에 음료 한 잔과 함께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산책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 작은 텐트를 치고 호수에서 함께 낚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자연 속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는 저런 여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느긋함을 즐길 여유가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우리 가족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화였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영국에서 사람들이 자연을 즐기는 방식을 볼 때마다 이런 분위기가 참 부럽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공원을 한 바퀴 모두 돌아본 뒤에는 입구 근처 카페에서 시원한 탄산수 한 잔을 마시며 산책을 마무리했다. 오랜 시간 걸어 다리가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조용한 자연 속에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무척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페인실을 방문하는 한국인이라면 날씨가 좋은 날에는 양산이나 모자를 꼭 준비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늘이 거의 없는 넓은 공간을 걷는 구간도 있으므로 생수 한 병도 미리 챙겨가는 것이 좋다. 충분한 시간과 편안한 신발까지 준비한다면 페인실의 여유로운 풍경을 더욱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이 글은 페인실에 직접 다녀온 경험과 직접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페인실의 역사와 정원 조성 과정, 주요 건축물 및 복원에 관한 정보는 페인실 공식 홈페이지와 Historic England의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운영시간과 입장료, 시설 개방 여부는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방문 전 페인실 공식 홈페이지에서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